제주도 푸른밤(세째날-섭지코지)

2005. 8. 21. 14:26떠나기 돌아와서 그리기



#1-4 [섭지코지]

섭지코지 정상에서 일몰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
대학때 좋아하던 기형도 시인의
'바람은 그대쪽으로'가 떠올랐다

#바람은 그대쪽으로 by 기형도

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.
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
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.

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
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
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. 외롭다.

그대, 내 낮은 기침 소리가
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
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.

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
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.
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.

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,
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
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.

아아,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
한 잎의 불을 끄리라.


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.
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
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
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.

그대,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,
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
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